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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두 노인 (성지순례, 이웃사랑, 회한)

by mystory60503 2026. 5. 30.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이 이야기를 십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줄거리는 기억해도 눈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순 해를 살고 나서 다시 마주친 예리세이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무게로 가슴에 쏟아졌습니다. 제 삶의 회한이 그만큼 쌓였던 탓이었을까요.

성직자보다 성자에 가까운 두 노인의 출발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나는 두 노인은 겉으로 보면 꽤 닮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예힘은 마을 원로를 두 번이나 지낸 엄격하고 신중한 인물입니다. 반면 예리세이는 술과 노래를 즐기고, 코담배를 끊지 못하는 소탈한 노인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외견상 더 경건해 보이는 예힘이 아니라, 더 인간적이고 허술해 보이는 예리세이를 통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가진 역설적 서사 구조, 즉 이레니즘(irênism)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여기서 이레니즘이란 종교적 형식보다 평화와 화해, 실천적 사랑을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사상을 말합니다.

저도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예힘 같은 삶을 동경했습니다. 원칙과 계획, 빠뜨리지 않는 꼼꼼함. 하지만 실제 제 삶을 돌아보면 이속을 따지는 장사꾼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톨스토이가 이 단편을 쓴 1885년은 그가 귀족의 삶을 버리고 농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지 한참 지난 후였습니다. 그는 생의 후반을 '나는 왜 사는가'라는 실존적 질문과 씨름하면서 보냈고, 그 끝에서 찾아낸 답이 바로 이 작은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출처: 톨스토이 재단 공식 사이트).

물 한 잔이 불러온 기적, 예리세이의 선택

두 사람이 함께 걷던 길에서 예리세이는 잠깐 물을 얻으러 오두막에 들어섰다가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가족을 만납니다. 그 순간이 이 소설의 분기점입니다.

예리세이가 보여준 행동은 계획된 것도, 대단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눈앞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멈춰선 것뿐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프로소셜 행동(pro-social behavior)이라고 부릅니다. 프로소셜 행동이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돕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행동은 상황적 공감 반응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예리세이가 고민한 장면이 저는 특히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밤새 뒤척이며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처음엔 물 한 잔이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이 문장에서 저는 제 자신을 봤습니다. 선한 마음이 생겨도 '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두어들인 기억들이요.

그가 꿈에서 깨어나 최종 결단을 내리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빛나는 대목입니다. '바다 건너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내 안에 하느님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한 문장이 이 소설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리세이가 그 가족을 위해 한 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빵과 물을 나누어 즉각적인 굶주림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 기장, 소금, 밀가루, 기름을 사와 음식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 저당 잡혔던 경작지와 목초지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 수레와 말 한 필, 밀가루 한 부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그 가족이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힘이 본 환영의 의미

예힘은 홀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묘 앞, 신성한 불꽃 아래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예리세이입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자리에서 보이지만, 미사가 끝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장면은 톨스토이가 문학적으로 활용한 테오파니(theophany)의 기법입니다. 테오파니란 신 또는 신성한 존재가 인간 앞에 나타나는 현현(顯現)을 뜻하는 종교 문학의 고전적 표현 방식입니다. 톨스토이는 예리세이를 실제 예루살렘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묘 앞에 세워 둠으로써, '진정한 성지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직접 던집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건 경이로움보다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형식적 신앙, 즉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올리는 행위 자체에 더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정작 길가에서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발걸음을 멈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렵습니다.

예힘이 돌아오는 길에 그 오두막 가족을 만나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가족들이 말합니다. '그분이 사람인지 신이 보내준 천사인지 알 길이 없다'고. 예리세이는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떠났습니다. 선행의 무기명성, 이것이 예리세이를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지는 멀리 있지 않다는 깨달음, 그리고 남은 삶

예힘은 여행에서 돌아와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예루살렘 성지를 밟았지만 집안은 흐트러졌고, 아들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예리세이는 성지에 가지 못했지만 가족은 평안하고, 오두막 한 가족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대비를 통해 수도권회(kenosis)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케노시스란 자신을 비워 타인을 채우는 자기 비움의 실천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입니다. 예리세이가 순례의 꿈, 남은 돈,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두 버렸을 때 오히려 성지에 가장 가까이 닿았다는 역설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마음속 깊이 성자의 삶을 동경해 왔던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동경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육십 년 동안 얼마나 벌어졌는지도 함께 보았습니다. 이제야 참회의 눈물이 나는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예리세이의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것은 거창한 선행이 아닙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 작은 멈춤이 진정한 순례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오두막 앞에 서 있지는 않으신가요?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지금 당장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두껍지 않습니다. 단 몇 페이지짜리 단편이지만, 읽고 난 뒤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느끼실 겁니다. 저처럼 십 년이 지나 다시 읽을 때 더 크게 울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남은 삶이 길수록 더 좋으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jpiq5mLS_0&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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