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큰아이가 동생을 발로 차는 걸 보고 한 시간을 설교했지만, 어린것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이해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모파상의 단편 '가족'을 읽고 나서 그 의문이 좀 더 무거워졌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는 지성
일반적으로 가족은 개인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울타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그리고 모파상이 100년도 더 전에 관찰한 것처럼, 가족이라는 집단이 오히려 개인의 지성을 서서히 잠식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의 화자 조르주는 15년 만에 재회한 친구 시몽 라드뱅에게서 예전의 지적 생기를 전혀 찾지 못합니다. 과거의 시몽은 눈빛만으로 서로를 이해하던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몽은 붉은 뺨과 불룩한 배를 가진, 먹고 자는 것이 삶의 전부인 낯선 남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퇴행(reg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퇴행이란 스트레스나 심리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할 때 더 원초적인 욕구 충족 단계로 후퇴하는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시몽은 지적 탐구가 주는 불안과 고독을 피하기 위해 먹고, 자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리듬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셈입니다.
특히 시몽이 다섯 아이를 의기양양하게 소개하는 장면이 저한테는 꽤 서늘하게 읽혔습니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연장물, 즉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훈장처럼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서 말하는 우월성 추구(striving for superiority)의 변질된 형태입니다. 우월성 추구란 인간이 무기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려는 근본 동력을 말하는데, 시몽의 경우 그 방향이 지성과 인격의 성장이 아닌 번식이라는 본능적 결과물로 뒤틀려 버린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며 큰아이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했지만, 돌아보면 그 말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모릅니다. 소설처럼, 우리가 가족에게 건네는 말들이 진심 어린 공감인지 아니면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모파상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의 유럽 중산층은 안락한 가정과 다복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습니다. 사실주의 문학(realism)은 당시 그런 사회적 이상을 있는 그대로, 때로는 냉정하게 해부하는 문학 사조였습니다. 사실주의 문학이란 낭만주의의 이상화를 거부하고 인간과 사회의 현실을 날것 그대로 묘사하려는 19세기 유럽의 문학적 흐름을 말합니다. 모파상은 바로 그 전통의 정점에 있는 작가로, 겉으로는 평화로운 가정의 식탁 아래에 얼마나 잔혹한 권력관계가 흐르는지 보여줍니다.
모파상이 묘사한 저녁 식사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불쾌감을 먼저 느꼈습니다. 중풍에 걸린 노인을 가족 모두가 조롱거리로 삼는 장면은 불편하다 못해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쾌함이 오래 남는 것은, 저 역시 어떤 순간 비슷한 위선을 행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구경거리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내 아이들

소설의 핵심 장면은 저녁 식탁입니다. 87세 노인은 달콤한 쌀죽을 앞에 두고도 가족들에게 놀림을 당합니다. 가족들은 그의 떨리는 손과 침 흘리는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웃습니다. 시몽은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노인에게 음식을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위를 돌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 장면에서 진짜로 작동하는 심리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가깝습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현실 인식을 왜곡하거나 욕구를 무효화하면서 자신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는 심리적 조작을 말합니다. 시몽은 도덕과 건강이라는 말을 방패로 삼아 노인이 원하는 것을 통제하고, 그 무기력한 반응을 온 가족의 오락으로 소비합니다.
더 섬뜩한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웃으니까 따라 웃습니다. 공감 능력(empathy)의 부재라기보다, 가정 안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학습하는 중인 것입니다. 공감 능력이란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정서적 능력을 말하는데, 이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환경에서 상당 부분 학습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어제 큰아이를 한 시간 동안 벌 세우고 설교하면서, 저는 그 아이가 동생을 차는 장면보다 제 자신의 모습을 더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고 자랍니다. 모파상의 가족 속 아이들도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가족의 역기능, 즉 가족 집단이 오히려 구성원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는 현대 가족 사회학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가족 내 권력관계와 학대 패턴이 세대 간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된다는 사실, 즉 부모 세대의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한 양육 방식이 자녀 세대에 그대로 반복된다는 현상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이 책이 담긴 앤솔로지에는 오 헨리, 카프카, 고리끼, 모파상의 작품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동서양 고전을 엮은 모음집은 각 작품의 온도가 워낙 달라서 연달아 읽으면 꽤 진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피로감이 오히려 독서의 증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모파상이 묘사하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성의 퇴행: 지적이던 청년이 15년 후 본능적 안락함에 안주하는 중년이 된 과정
- 가족의 폭력성: 건강과 돌봄이라는 명분 아래 노인의 마지막 즐거움을 박탈하는 행위
- 세대 전이: 아이들이 부모의 가학적 유희를 그대로 학습하는 식탁 장면
- 정신적 빈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평원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드러나는 내면의 공허함
모파상의 질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베푸는 배려가 진심인지, 아니면 통제와 이기심을 가리는 포장지인지. 그 질문을 저도 어제 설교를 마치고 조용히 마주했습니다.
모파상의 '가족'은 불편한 소설입니다. 읽고 나서 뿌듯하거나 따뜻해지는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오래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에 가깝다는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룬 고전을 읽을 때, 저는 언제나 등장인물보다 저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게 됩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같이 읽으면 그 불편함이 좀 더 입체적으로 쌓입니다. 불편한 독서야말로 가장 솔직한 독서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