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소설집 '디어 라이프'는 절필 선언과 함께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위로받은 건지 찔린 건지, 그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유년의 기억, 우리는 그 집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앨리스 먼로는 자전적 서사(autobiographical narrative), 즉 작가 자신의 실제 삶을 소설의 뼈대로 삼는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자전적 서사란 허구의 이야기를 꾸미는 대신, 작가가 실제로 살아낸 시간과 감각을 그대로 소설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말합니다. '디어 라이프'의 마지막 단편도 그런 글입니다. 1931년생 주인공이 어린 시절 살던 집, 그 집으로 이어지는 긴 길,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난 길. 그 공간의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읽는 동안 내내 제가 아는 어느 골목이 떠올랐습니다.
소설 속에서 흥미로웠던 건 네터필드 노부인 이야기입니다. 미쳤다는 소문이 돌던 그 노부인이 어느 날 손도끼를 들고 배달 청년에게 달려들었다는 일화는, 나중에 가서야 다른 의미로 읽힙니다. 노부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왔던 것이고, 창문에 손을 짚고 들여다보던 그 행동은 그리움의 표현이었던 거죠. 어머니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기를 안고 부엌에 숨어 있던 어머니 눈에는 그저 위험한 노파였을 테니까요.
제가 직접 느껴봤는데, 오래된 집이나 골목을 지날 때 발걸음이 멈추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이상하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 소설에서 노부인의 행동을 읽으며 그게 단순한 미침이 아니었겠다 싶었습니다. 고향이나 옛집이라는 장소가 가진 공간 기억(spatial memory), 쉽게 말해 특정 장소가 몸과 감정에 각인된 기억을 뜻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소설은 조용히 보여줍니다.
핵심 포인트:
- 자전적 서사는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흐리며 독자에게 더 깊은 공감을 유도합니다
- 네터필드 노부인의 행동은 '광기'가 아니라 '귀환 본능'으로 재해석됩니다
- 고향 집의 공간 기억은 세대를 넘어 연결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자기 용서, 과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소설의 가장 무거운 대목은 마지막입니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임종에도,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둘이었고, 경비가 없었고,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습니다. 소설은 그 이유들을 나열한 다음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예상 밖이었습니다. 변명도 아니고 자책도 아닌, 그 어정쩡한 지점에 소설이 멈춰 서 있는 것이 묘하게 정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자기 용서(self-forgiveness)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심리학적으로는 과거의 잘못이나 후회스러운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향한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 용서를 쉽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실제로 경험해보니 그 과정이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합리화라고 보기도 합니다. 반대로 끝없는 죄책감이 오히려 현재를 갉아먹는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더 공감이 됩니다만, 그게 정답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정신 건강 측면에서 만성적 자기 비난은 우울 증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지속적인 죄책감이 치유가 아니라 오히려 반추(rumination), 즉 부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해서 씹는 인지 패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래서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렇다." 이건 가볍게 던지는 위로가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도달한 결론처럼 읽힙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용서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소설을 덮은 후 서서히 다가오는 위로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그 감각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삶의 의미, 나이 들수록 달라지는 것들
앨리스 먼로가 이 소설집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한 이유가 인상적입니다. "나이가 들어 외로운 작가의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 거기에 무언가 단호하면서도 솔직한 것이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에도 수상 소감보다 절필 소식이 더 먼저 떠오를 만큼, 그 결정은 그녀의 마지막 소설과 함께 읽힙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실존적 탐구(existential explora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실존적 탐구란 인간이 자신의 죽음, 자유, 고독, 의미를 직면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내면의 작업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탐구가 더 절박해지거나, 반대로 더 차분해지기도 합니다.
저도 나이 들면서 하루가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봄날 아침 빛이나 늦가을 바람 같은 것들이 이제는 멈추게 만듭니다. 연파랑 봄까치꽃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그냥 지나치기 아깝다는 느낌이 생겼습니다.
문학이 독자의 정서 조절 능력과 공감 능력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연구도 있습니다(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서사적 공감(narrative empathy), 즉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이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디어 라이프라는 제목은 '삶이여'라고 부르는 말처럼 들립니다. 영어에서 "for dear life"는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두 가지 의미가 겹쳐지면서 소설 전체를 감쌉니다. 귀한 삶, 그리고 그 삶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것.
결국 이 소설이 남기는 건 판단이 아니라 돌아봄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한동안 지나간 시간을 다르게 바라보게 됐습니다. 주변의 시선이나 재촉받는 양심이 나 자신보다 앞서 있었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 이 하루가 금싸라기 같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한 건 그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고 나서였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괜찮다는 말이 들립니다. 앨리스 먼로가 마지막 책에서 건네는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머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