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전 세계 물가상승률이 3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저도 장 볼 때마다 느끼지만,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반년 전보다 확실히 줄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다 보니 당장은 '괜찮겠지' 하고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월급 명세서 숫자는 조금씩 올라도 장바구니는 점점 가벼워지는 이 기묘한 상황,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화폐착각: 숫자에 속는 우리
명목임금(Nominal Wage)과 실질임금(Real Wage)의 차이를 아시나요? 여기서 명목임금이란 급여명세서에 찍힌 그대로의 금액을 뜻하고, 실질임금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실제 구매력을 계산한 금액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월급 200만 원 받던 사람이 올해 210만 원을 받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명목임금 상승률은 5%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이 2.3%라면 실질임금 상승률은 2.7%에 불과합니다. 10만 원 올랐다고 좋아했는데 실제 구매력으로 따지면 54,000원밖에 안 오른 겁니다. 저도 이 계산법을 처음 알았을 때 허탈했습니다. 그동안 월급이 오른 만큼 생활이 나아질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는데, 실상은 물가가 그 기쁨을 절반 이상 가져간 셈이었으니까요.
이런 걸 경제학에서는 '화폐착각(Money Illusion)'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숫자가 주는 안정감 때문에 돈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합니다. 간단한 실험 결과를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 A안: 물가가 4% 오르고 월급이 2% 오르는 상황
- B안: 물가가 0%이고 월급이 2% 내리는 상황
두 선택지의 실질임금은 똑같이 -2%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A안을 더 손해라고 느낍니다(출처: 행동경제학회). 명목상 월급이 올랐다는 숫자에 안도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임금 하락의 숨은 메커니즘
인플레이션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 세금입니다. 국가가 필요한 돈을 세금으로 거두면 국민들이 반발하지만, 화폐를 더 찍어내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화폐량(Money Supply)이란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데, 이게 생산량 증가 속도보다 빠르게 늘어나면 물가가 오릅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종이돈을 아무리 많이 찍어내도 생산량이 그만큼 늘어난다면 물가는 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생산량은 무한히 증가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 시기 미국이 막대한 양의 달러를 찍어냈을 때, 전 세계가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축통화(Reserve Currency)인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말이죠.
기축통화는 국제거래의 결제와 외환보유액으로 널리 쓰이는 화폐를 뜻합니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라는 특권 덕분에 돈을 많이 찍어내도 다른 나라처럼 화폐 가치가 급락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달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조가 얼마나 불공정한지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3억 미국인이 아니라 전 세계 80억 인구가 사실상 미국의 인플레이션 세금을 나눠내는 셈이니까요.
1994년 아르헨티나에서 100달러를 환전하면 99페소를 받았습니다. 2024년에는 같은 100달러로 수만 페소를 받습니다. 돈을 많이 바꿔준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자국 화폐 가치가 그만큼 추락했다는 뜻이니까요(출처: 국제통화기금 IMF). 외환보유액이 국가의 신용도를 나타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환율 상승이 서민 주머니를 털어가는 방식
환율 올라도 나라는 안 망한다고 말하는 경제학자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라는 안 망할 겁니다. 하지만 서민들 주머니는 먼저 망합니다. 대한민국처럼 식품과 에너지를 전량 수입하는 나라에서 환율이 오르면 물가는 자동으로 따라 오릅니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생필품 가격만 치솟는 겁니다.
저는 일본이나 대만과 비교하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한국과 경제 규모 자체가 다르고, 대만은 세수가 넉넉해서 국민에게 돈까지 뿌리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과 저 나라들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현실을 모르는 소립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건물을 지으려고 팬데믹 시기에 대출을 받은 지인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무거운 빚이었지만 인플레이션이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억 원을 빌렸다고 가정할 때, 연 3%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1년 후 그 빚의 실질 가치는 약 9,700만 원이 됩니다. 이런 걸 '빚이 녹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돈을 빌려준 사람은 그만큼 손해를 봅니다.
하지만 대출을 받을 여력도 없는 서민들에게 인플레이션은 일방적인 손실입니다. 소비는 줄어들고 내수는 망가지고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언론에서는 숫자만 툭 던져주고, 그게 제 월급, 제 저축, 제 식비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이 결국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털려 나가는 '숨은 세금'이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닙니다.
정책 결정자들이 돈을 푸는 것도, 금리를 조정하는 것도, 환율을 관리하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 통장의 숫자가 왜 점점 가벼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더 솔직하고 자세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명목임금이 올랐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실질 구매력을 따져보면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화폐가치 하락의 피해는 결국 서민부터 먼저 체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 경고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기록으로 남았으면 합니다.